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와 비트코인

더 높은 실존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비트코인


비트코인과 명목화폐를 지켜보면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떠오른다. 명목화폐는 우리를 미적 실존에 가두지만 비트코인은 우리가 더 높은 실존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무’ - 윤동주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일반적으로 나무는 외부 세계인 바람에 영향을 받는 존재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나무의 행동이 외부 세계인 바람을 제어한다고 보았다. 윤동주 시인은 나무처럼 세상의 중심은 '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실존’이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을 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 3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 미적 실존

미적 실존은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다. 그러나 쾌락을 좇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내면은 비어만 가고 공허해진다. ‘나’라는 존재가 외부 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며 쉽게 흔들린다. 로마의 왕 ‘네로’는 부와 권력을 가졌지만 미적 실존에 갇혀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명목화폐는 우리를 미적 실존에 머무르도록 유도한다. 내일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는 지금 당장의 소비를 부추긴다. 소비는 쾌락을 부른다. 우리는 타인과 자신의 소비를 비교하며 악순환에 빠진다. 중앙은행 정책에 화폐 가치는 휘청인다. 외부에서 몰아치는 태풍에 우리는 쓸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단계. 윤리적 실존

보편적인 윤리적 의무를 추구하는 단계다. ‘나’는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이 단계부터 윤동주 시인의 나무처럼 ‘나’라는 존재가 외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더이상 외부 세계의 폭풍우로 '내'가 휩쓸리는 일은 없다.

비트코인은 윤리적 실존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가치가 보존되기에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지 않으며 자원을 중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노동은 존중받고 생산품의 품질은 올라간다. 국가라는 외부 변수에 흔들림 없다. ‘내’가 중심이 되어 경제 결정권을 갖고 올바른 삶을 이끈다.

3단계. 종교적 실존

절대적 존재자를 따라 신앙을 추구하는 단계다. 인간이 윤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간다 해도 인간이란 존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윤리적 실존의 끝엔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참다운 실존이 되기 위하여 ’절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트코이너들을 보고 종교인과 닮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내 생각엔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비트코인의 힘은 그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장부와 화폐 발행이 그것이다. 윤리적 실존에 도달하기도 힘든 우리가 화폐에 손을 대도 괜찮을까?

인간이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만한 생각인 것처럼 화폐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오만한 생각이다. 우리들을 미적 실존에 허덕이도록 유도하는 명목화폐는 그 오만의 결과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기댈수록 우리는 '실존'을 손에서 놓게 되는 것은 아닐까?